국민의힘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임명 29일 만에 사퇴했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단순히 '혁신가의 좌절'로 해석하는 것은 본질을 흐릴 수 있다. 이번 사건은 혁신 프레임의 실패가 아니라, 혁신을 말해온 보수 기득권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장면에 가깝다.
이정현은 누구인가: 상징과 실체의 간극
이정현 위원장 인선 당시 지도부는 그를 "호남 출신"이라는 상징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이력은 민주자유당 당직자, 3선 의원, 박근혜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 새누리당 대표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친박 핵심 경로를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지방시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친윤 노선과 결을 같이했다.
즉, 그는 박근혜 탄핵 이후에도, 윤석열 체제 이후에도 보수 권력의 중심부를 떠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공천 혁신과 세대교체를 주도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과도했다는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대안과미래'의 경고는 왜 맞았나
당내 의원 모임 '대안과미래'는 이정현 임명 직후부터 당헌·당규 개정 방향을 문제 삼았다. 핵심은 인구 50만 이상 지역의 공천권을 중앙당이 직접 행사하도록 바꾼 구조다. 이는 시·도당과 당원 참여를 축소하고, 지도부 중심으로 공천권을 집중시키는 설계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이번 사퇴 파동 역시 대구·부산 경선 방식을 둘러싼 지도부 충돌에서 비롯됐다는 내부 증언이 나오고 있다. 보수 텃밭 공천의 실권을 누가 쥘 것인지가 갈등의 핵심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혁신 노선의 좌절이 아니라 권력 배분 갈등의 폭발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절윤 결의문: 선언과 실행의 거리
국민의힘은 의원총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정치 복귀 요구에 반대한다"는 절윤 결의문을 채택했다. 문구만 보면 강하다. 그러나 결의문 발표 직후에도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천 신청 보류, 지도부 내 기획 논란, 친윤계 반발이 이어졌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실행이다. 친윤 핵심 인사가 그대로 남아 있고 공천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결의문은 노선 전환의 출발점이 아니라 지지층 이탈을 막기 위한 정치적 알리바이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진짜 혁신의 조건
혁신이 진짜라면 최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친윤·윤 어게인 세력과의 실질적 절연이다. 둘째, 중앙당 집중형 공천 구조를 풀고 시·도당과 당원 참여를 복원하는 공천 민주화다. 셋째, 계엄과 탄핵에 대한 모호한 언어를 버리고 정치적 책임을 분명히 하는 정직한 평가다.
이 세 조건 없이 이뤄지는 쇄신 선언은 유권자에게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간판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내부 구조의 연속성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유권자는 간판이 아니라 구조를 본다
이정현 사퇴를 '혁신가를 막은 구세력의 저항'으로 단순화하면 이번 사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번 사건은 친박-친윤으로 이어진 기득권 정치가 혁신의 언어를 차용하는 방식, 그리고 공천 권력을 둘러싼 내부 충돌이 어떻게 표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지지율 하락과 민심 이탈은 이미 신호를 보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호가 아니라, 공천·인사·노선에서 확인 가능한 구조적 변화다. 유권자는 간판이 아니라 가게 안의 진열을 본다.
이 글은 공개된 보도를 바탕으로 작성한 시사 사설이며, 필자의 견해를 담고 있습니다.